오래된 미래
어느 해인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진용 작가의 “In my memory” 전을 갔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이 담긴 오브제는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곤 아웃 포커싱 뒤에 숨겨진 기억의 실루엣들이 하나씩 내 앞에 이미지를 드러냈다.
가게 앞 마루 위에 서 있던 동그란 아이스크림 통 그리고 연필, 리코더와 작은 북, 사촌형이 준 푸른색 만년필, 선생님이 주신 초록색 영문법, 소피 마르소가 웃고 있던 달력과 여공, 여고생들에게 받은 팬 레터, 67번 버스.
열 살이었나? 가게 앞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아이스크림이 든 통이 갑자기 넘어져 깨어진 일이 있었다. 너무 겁이 난 나는 다락방에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주인 아저씨가 찾아오셨다. 내가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이보다 더한 충격은 학교에서 일어났다. 산수 시험을 치르다 연필을 떨어뜨렸다. 그걸 줍다가 부정행위로 오인 받아 그 자리에서 뺨을 맞았다. 쉬는 시간에 머리가 너무 아파 많이 토했다.
억울함—내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사람도 세상도 모두 두려운 아이가 어떤 논리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사람들 앞에 무력해지는 진실을 보았다.
리코더를 곧 잘 불어 기악부에 발탁되었던 나는 유일한 남자라는 이유로 큰 북을 치게 되었다. 피리 불러 왔다가 북 채를 손에 쥔 내게 창피함은 보증 된 거나 다름 없었다. 큰 북은 적응이 어려웠고 여자 아이들 얼굴을 볼 수조차 없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 수돗가에 가서 물을 틀어 놓고 울고 말았다.
위로—누군가 훌쩍이던 어깨를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그때 깨달았다. 힘겨울 때는 그냥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자동차 회사의 연구원이었던 사촌 형이 예쁜 만년필을 선물로 사왔다. 신기했는지 반 친구들이 억지로 뺏어가 장난을 치다 결국 부러뜨리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상실감—펜이 부러진 것이 아니라 나는 마음이 부러졌는데... 소중한 존재를 잃어본 사람은 안다. 잃으면 찾아오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삶에서 그걸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걸 십대의 나는 알았다.
선생님은 내 맘 아실까?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고 눈을 맞춰주실 때 죽어있던 심장이 살아났다. 사춘기의 짝사랑이기도 했지만 선생님이 주신 초록색 영문법 책을 아끼고 아껴가며 보았다. 가끔 선생님이 한 번만 나를 꼭 안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로움—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찾아오는 감정. 선생님의 시선 하나, 부르는 목소리 하나에 간절히 매달렸던 그 시절을 지나서야 알았다. 사랑 받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순수한 것인지를.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방문을 열면 창문 왼쪽 위에서 미소 짓는 소피 마르소 누나가 참 좋았다. 가끔 엄마 대신 가게를 볼 때가 있었는데, 근처 신발 공장으로 출근하는 누나들이 물건을 사러 오곤 했다. 부드럽고 긴 머리카락에 따뜻함과 고단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얼굴에서 봄에 색깔이 있다면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떨림—사춘기라는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동요. 누나들의 미소가 왜 그렇게 환했는지, 피곤에 젖은 얼굴이 왜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음악 잡지에 이름이 나온 이후로 매일 팬 레터가 집으로 왔다. 여러 지방에서 보낸 또래 여학생들의 편지에 마음은 무거웠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예쁜 손 글씨였다. 학교에 갔다 오면 편지를 찾아 읽기만 했다. 왜 답장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감수성—센티멘털과는 다르다. 세상의 모든 떨림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편지를 읽기만 하고 답장을 쓰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내 마음이 얼어붙은 호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이 너무 깊어서 오히려 표현은 얼어붙었던.
67번 버스를 타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올 때면,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에 여학생들이 타는 것을 보게 된다. 옷을 보면 인문계 여고 학생들은 아니다. 여실 학생들이다.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우리 또래의 여학생들, 가냘픈 몸에 무거운 발을 끌고 버스에 오른다.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한없는 부끄러움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미안함—모두가 어려울 때지만 엄마가 챙겨주시는 밥 먹고 공부만 하면 되는 내가 몹시도 미웠다. 타인의 삶을 보며 스스로가 미워지는 것이 미안함이라는 것을 그 여학생들을 보며 알았다.
억울함, 위로, 상실감, 외로움, 떨림, 감수성, 미안함.
다른 모양을 하고 기억 속에 들어온 이 낱말들과 조각조각 흩어져 숨어있던 에피소드들이 '나'란 존재의 아주 작은 부분들을 밝혀주는 촛불이 아니고 무엇일까? 세월에 묻혀 잊어버리고 있었던 하나하나의 오브제들을 건져 올려 보면서 나는 오래된 미래를 꿈꾼다.
Thanks for reading!